나는 아내랑 각 방을 쓰고 있습니다.
한참 되었습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벌써 임포가 되었거나 아내와 성격상으로 불화를 겪고 있는 건 아닌지 오해할 듯
싶습니다.
허나 쑥스럽게 고백하자면 나는 여전히 원기 왕성하며 아내가 부재한다면 곧바로 패닉 상태에 빠져 버릴
게 분명한 남편입니다.
아내가 나 보고 시장 같이 가자고 할 때 감사한 마음 때문에 한없이 감개 무량해 하는 철없는 남편이지요
그렇게 부부의 정이 각별한데 각방을 쓰는 이유는 순전히 11살 막내 딸의 엄마를 향한 스토커적 사랑 때
문이랍니다.
막내 딸 예랑이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엄마의 스킨 쉽을 요구하며 잠잘 때도 엄마를 완전 끌어 안고 잡니
다.
예랑이는 아직도 엄마랑 인형 놀이 하는 걸 인생 최대의 기쁨으로 여기고 있고 그걸 하루에 한 번씩 강요
하곤 한답니다.
당연히 아내는 그런 딸아이에게 타이르기도 하고 급기야는 야단도 치다 결국은 싸움까지 하게 됩니다.
싸움을 할 때 보면 논리적인 쪽은 오히려 예랑이 입니다.
딸이 원하는 사랑을 언제나 아낌없이 베풀어야 하는 게 엄마의 도리 아니냐...왜 인형 놀이랑 공부랑 연관
시키느냐....공부는 열심히 할 때도 있고 안 할 때도 있는데 안하는 순간에 야단 치는 것은 아동 학대이
다... 뭐 이딴 식으로 조둥아리 야무지게 놀리고 나면 아내는 흥분해서 씩씩거리다가 네 인생을 나는 이
제 포기(?)하겠다고 마지막 히든카드를 날립니다.
그러면 막내 딸은 닭똥 같은 눈물을 서럽게 흘리면서 노여운 표정으로 아무 말 안합니다. 그걸로 게임 셋
입니다. 그러면 둘은 더욱 뜨겁게 끌어안으며 화해를 하고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정하게 인형놀
이를 합니다.
그걸 곁에서 지켜보는 나는 모랄까... 초대받지 못한 파티에 우연히 가게 된 사람의 어색함이랄까... 아무
튼 나는 동일한 연대감을 느끼지 못한 채 거실에서 홀로 프리미어 축구를 봅니다.
프로이드가 말한 일렉트라 콤플렉스식으로 말하자면 딸아이가 남근을 부러워 하며 자신의 성이 여성이라
는 것에 불만을 품고 어머니를 미워하며 남근을 소유한 아버지에게 애정을 가지게 되어야 하는데...우리
딸에게 있어 연정의 대상은 언제나 엄마입니다.
새벽녘에 기습 잠입하여 아내를 슬며시 깨워 침대에서 빠져 나오라고 속삭이면 이 자식이 무의식중에 어
떻게 알았는지 아내를 꽉 끌어 안습니다.
새벽녘에 아트 한 번 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공연히 공허해지고 맙니다.
막내 딸이 서대문 청소년 수련관에서 댄스를 배우는데 매번 엄마보고 같이 가자고 조릅니다. 딱히 할 일
도 없는 아내는 또 그 고집을 못 꺽고 같이 가 줍니다.
이렇게 집에서는 욕심꾸러기 고집쟁이 딸인데... 이 자식이 밖에 나가면 또 변신을 합니다. 담임 선생님에
게는 솔선 수범하는 모범생이고 이웃 주민들에게는 인사 깍듯하게 잘하는 예의 바른 아이랍니다. 아파트
경비 아저씨에게도 꼬박 꼬박 시원한 드링크나 따뜻한 커피를 사드려서 경비 아저씨는 예랑이가 최고라
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워 주곤 합니다.
같은 반 친구가 부족한 게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나누어 줄려고 애 씁니다.
학교 급식이 남으면 남은 음식을 챙겨 오고, 길을 가다 구세군 아저씨 만나면 반드시 자선 냄비에 땡그랑
소리를 울리고, 내 차를 같이 타게 되면 운전대 두 손으로 잡으라고 무지하게 잔소리를 해 댑니다.
그러니까 나의 고민은 이렇습니다.
내 딸이 분명히 사리 분별은 할 줄 아는 것 같은데, 엄마하고 같이 있게 되면 인형 놀이 하자고 응석을 부
리고 무조건적으로 자기만 사랑해 줄 것을 요구하여 급기야 엄마가 의당 아빠랑 정기적으로 치르어야 할
성스러운 리추얼(ritual) 마져 훼방을 놓는 다는 것입니다.
말로도 설득이 되지 않고 (11살 딸한테 어른들에게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자세히 설명할 수도 없
고...) 아내랑 같이 자고 싶은데 그걸 허락하지 않는 딸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도 없고...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