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둘 째 날 >
첫 날 카오산 거리를 많이 걸어 다녀 피곤했음에도 불구하고, 둘째 날 새벽 숙소 밖의 차량 소음 때문에 일찍 깼다.
이런 저런 상념에 젖어 있는데 큰 딸 해랑이가 일찍 일어나 부산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해랑이에게 아침 산책 나가자고 했더니, 그럴 계획이었다고 반갑게 응답한다.
숙소 근처 방람푸 운하 옆에 공원이 하나 있었다.
체조하는 사람들, 담소를 나누는 나이 드신 노부부, 홀로 강물만 바라보고 있는 여행객,
그리고 평화롭게 모이를 주어 먹고 있는 새떼들의 풍경이 정겹다.
커다란 고목에 청솔모가 열댓마리 군집하고 있었는데, 사람을 경계하지 않고 저희들끼리 나무에서 놀고 있는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
이 공원이 저녁에는 젊은이들의 공간이 되어 열린 무대에서 그들의 끼를 발산한다고 한다.
오늘 우리의 오전 코스는 왓포 사원과 왕궁 그리고 왓 아룬이다.
툭툭이를 대절해서 다녔어야 마땅했는데, 무모하게 도보로 결정하고 말았다.
취지는 방콕 거리를 두 발로 느껴보자는 것!
왓포와 왕궁의 입장료는 400B.
4명 합쳐 대략 우리 돈으로 6만원쯤 되었지만 여행 필수 코스라기에 입장했다.
수려하게 채색된 사원과 열반에 든 황금색 와불등의 화려함이 우리를 압도한다.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느라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고, 우리들도 인파속에서 인증 샷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너무 더운 날씨에 많이 걸은 막내 딸 예랑이가 퍼지자 해랑이가 야단을 친다.
그러면 내 마음이 무거워진다.
예랑이가 유적지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아쉽지만 훗 날 좋은 체험이 되리라 믿는다.
우리는 동선의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이리 저리 헤매다가 왕궁 쪽으로 빠져나갔다.
비싼 돈을 들여 입장했는데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사원을 나온 것 같아 아쉬워하자 아내가 다시 들어가자고 했는데...
일방향 코스여서 난감해졌다.
그 와중에 그만 아내를 향한 내 언성이 날카로워지고 말았다.
중재하려고 했던 해랑이에게 까지 목소리를 높였으니...내가 민감해져 있었던 게 분명하다.
‘탓하는 말 하지 말고 격려의 말만 하자’며 다시 으쌰 으쌰 한다.
(우리 가족은 잘 삐치고 금새 또 화해한다)
그런데 오히려 왕궁은 배경 사진으로 찍기에 훨씬 멋지다.
울긋불긋한 화려함 대신에 유럽풍의 모던한 양식으로 치장한 왕궁을 롱 숏 배경으로 찍으면서 랑이 자매는 모델이 된다.
왓 아룬으로 건너가는 배삯은 겨우 3B(110원)임에도 불구하고 정취가 묻어난다.
운하를 배경으로 배안에서 찍는 샷은 대충 찍어도 그림이 된다.
점심 식사를 하며 구한 라면 박스 조각 부채로 배를 운항하는 기사분에게 부채질을 해 드렸더니 고맙다며 씨익 웃으신다.
내친김에 배안에 있는 승객들에게 부채질을 해 주자 모두들 좋아한다.
나로서는 해외에서 하는 첫 자원봉사인 셈인데 가족들이 창피해 하는 것 같다.
왓 아룬 사원을 둘러보며 오히려 이곳이 비싼 와포 보다 좋다 라고 우리 가족은 의견 일치를 보았다.
화려하고 번잡한 곳보다는 고즈넉한 곳을 좋아하는 성격 때문일 것이다.
왕궁과 와포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높다란 탑에 오르는 것을 막내 딸이 포기하는 바람에
나는 예랑이와 함께 그늘에 앉아 휴식을 취했고 아내와 해랑이만 탑에 올라갔다.
여행을 떠나기 전 아내와 해랑이는 걷기 연습을 많이 해 서인지 완전 걷기 머신이다.
헐리우드 톱스타 리차드 기어가 왓 아룬에 와서 ‘원더 풀’을 외쳤다는데 나도 리차드 기어처럼
은근 섹시한 눈빛으로 원더 풀을 외치며 사진 한 방 남겼어야 하는데 아쉬웠다.
너무도 지친 발걸음 때문에 우린 툭툭이를 외쳤고 택시 타고 40B면 갈 거리를 120B에 탄다.
택시보다 불편하지만 불어오는 바람을 온 가슴으로 맞이할 수 있다는 낭만 버전으로 우리는 또 한껏 들뜬다.
오후 일정은 두씻 정원과 짐 톰슨의 집을 방문하는 것이었는데, 오전에 너무 과하게 걸은 탓에
‘차이나 타운’을 버스를 타고 방문해 보기로 변경했다.
무척 친절하신 숙소 주인은 ‘차이나 타운’ 가는 버스 번호와 ‘차이나 타운’을 태국어로 적어 주신다.
차이나 타운 가는 53번 버스는 학창시절 탔던 버스마냥 무척 낡고 요금을 걷는 안내 아줌마도 있었다.
26B를 내니깐 긴 통에서 우표만큼 작은 티켓 4장을 끊어 주신다.
툴툴거리는 낡은 버스 차창가에 앉아 아내의 손을 잡고 방콕 시내를 바라보는 일도 즐거운 일이다.
아내 역시 버스를 타서 차창 밖을 내다보는 일이 재미있고 편하다고 한다.
그런데 방콕 시내 버스는 일방향도 많고 이리 저리 돌아가는 코스가 많아 무척 복잡하다.
안내 아줌마에게 우리가 내릴 ‘차이나 타운’ 태국어를 보여 주자 여기서 내리라면서 저쪽을 가르친다.
우리는 땡큐를 연발하면서 내렸으나 저쪽 어디에도 ‘차이나 타운’은 없었다.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차이나 타운’ 태국 문자를 보여주면 어떤 사람은 위쪽을 가르키고,
어떤 사람은 아래쪽을 가르키고, 또 어떤 사람은 아래 위 쪽을 연속해서 가르키며 태국말로 무어라 열심히 설명한다.
아... 도데체 어디로 가라는 이야기인지 도통 헷갈리고 알아들을 수가 없다.
낭패감에 젖어 있는데 여기서 다시 구세주가 나타난다. 영어가 되는 아가씨이다.
결론은 위쪽에서 다시 버스를 타서 아래쪽으로 가라는 거였다.
우여곡절 끝에 차이나 타운에 입성했다.
차이나 타운은 네온싸인이 번쩍거리는 불야성의 스트리트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산가족이 되면 안되므로 헤어지면 저 건너 방콕은행 앞에서 만나자는 비장한 약속을 하고선
가족끼리 두 손을 꼭 잡고 걸어 다녔다.
가족끼리 그렇게 끈끈하게 손을 잡고 걸은 적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대형 포장마차에서 우리들은 SEA FOOD을 서너가지 시켜 먹었다.
음식 담당은 우리 큰 딸인데 아무튼 무지하게 섬세하게 따진 후 결정한다.
술 좋아하는 인간들은 술 안주 대충 시켜 놓고 빨리 빨리 술 한잔 마시는 것이 목적인데,
해랑이는 음식 메뉴 판 보는 것도 쇼핑 수준으로 한다.
그것 때문에 우리 딸이랑 은근 찬란 신경전이 펼쳐지기도 한다.
음식 맛은 한가지만 빼고는 기대 이상이었다. 한가지는 태국 특유의 ‘팍취’ 향 때문일 듯.
다음 코스는 ‘크럼 통’이라는 도둑시장인데, 우리 큰 딸이 생각한 야시장하고는 발음이 비슷했을 뿐 다른 곳이었다.
자신감이 붙은 우리는 그 곳도 버스를 타고 갔고, 그리고 정확한 곳에 내렸는데...
이런 크럼 통은 주말에만 열리는 야시장이었던 것이었다.
아빠의 치밀하지 못함에 해랑이는 불만을 표시했고, 나는 그러면 처음부터 같이 확인했어야지
뒤늦게 불만을 표시하면 안 되는 거라고 큰 소리로 야단을 치고 말았다.
방콕 어느 알 수 없는 골목 희미한 가로등 아래서 우리 가족은 싸우고 있는 중이다.
도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우리는 툭툭이를 타고 카오산 로드로 갔는데 버스 타고 올 때는 먼 길이었는데 툭툭이를 타니깐 잠깐이었다.
길을 모르니깐 방향 감각과 거리 감각이 현저히 떨어졌다.
분위기 좋은 펍 레스토랑에 가서 우리 가족은 다시 화해의 시간을 가졌다.
해외여행을 자유여행으로 오는 과정에서 내가 가장으로서 책임감 때문에 사소한 일에도 마음이 민감해져 있었던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
큰 딸 해랑이가 여행 공부도 많이 하고 그래서 이런 저런 결정을 할 때 자기 뜻대로 결정하려고 하는 부분에서
내 맘에 안드는 것이 있어서 불편해졌던 것이다.
의사결정시 해랑이가 결정할 때는 아빠에게 재가를 받는 것이 좋겠다는 쪽으로 결론을 짓고 우리 가족은 다시 찐하게 건배를 외쳤다.
여행의 좋은 점은 여행 과정을 함께 하면서 함께 간 사람의 특성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는 점이다.
나는 우리 큰 딸을 어리게만 봤는데 낯선 곳에서도 야무지게 행동하고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다는 점도 이해하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쇼핑에 호기심이 많다는 것이다^^*)
어쩌면 해랑이가 훗날 오퍼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까지 하게 되었다.
카오산에서 숙소로 향하는 길이 정감있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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