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조수석을 보니 미경이는 전복된 차 안에서 죽은 사람처럼 아무 반응이 없이 안전벨
트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나는 안전벨트를 풀고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몸무게의 하
중을 받은 안전벨트는 아무리 노력해도 풀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뒤집힌 차량이
폭발하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면서 극도의 불안감 속에서도 안전벨트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바둥거렸다.
한참을 살기 위해 몸부림칠 때 몇 명의 사람들이 몰려왔으나 뒤집어진 차 안에서 안전벨트
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우리를 구경만 할 뿐, 아무도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는 거였다. 구
경꾼들은 아마도 공중으로 ‘프라이드’ 가 날아올랐으므로 영화 촬영을 하는 줄 알았는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운이 좋았다. 마침 서울 방향으로 달리고 있던 미군 여덟 명 정도가 쓰리
쿼터(트럭)를 타고 지나가다가 우리를 발견하고 도와준 것이다. 뒤집어진 차 안에 있던 우리를 꺼
내 주었다. 그녀는 미군들이 차안에서 꺼낼 때쯤 정신이 돌아왔다. 어디에 마찰이 되었는지
내 왼쪽 다리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 피가 나고 있었고 머리에는 유리 조각이 박혀 이마로
피가 흘렀다. 안전유리이기 때문에 상처가 깊지는 않았다. 나는 걸을 수 있었으나 그녀는
허리를 펴지 못하고 몸을 앞으로 굽힌 채, 마른 풀밭에 앉아 있었다. 곧이어 견인차와 구급
차가 왔다. 잽싸게 달려온 견인차는 형체가 몹시 일그러진 ‘프라이드를 어디론가 싣고 갔다.
그녀는 구급차에 실려갔으며, 절룩거리며 걸을 수 있었던 나는 근처의 상점으로 가 보험회
사에 전화를 걸었다. 보험회사에 사고 내용을 알리자, 먼저 경찰에 신고를 해야 사고접수가
되고 보험 처리를 할 수 있다는 거였다. 나는 곧바로 남양주 경찰서에 사고 내용을 신고했
다. 지금은 큰 인명 피해만 없으면 경찰에 신고를 할 필요가 없는데, 그 때는 그랬다. 잠시
후에 자가용 르망 차가 한 대 서더니 “뭐 도와줄 것 없냐?” 고 물어왔다. 남양주 경찰서까
지 태워줄 수 있냐고 하니까, 자기도 갑자기 사고를 당해서 당황한 적이 있다며 친절하게
태워다 주었다.
남양주 경찰서에 도착하자 경찰이 조서를 꾸미기 시작했다. 약 두 시간에 걸쳐서 조서를 작
성하더니 사고 현장으로 나를 데려가는 거였다. 자기의 ‘포니’ 승용차로 가자며 주유소에 차
를 세우더니 기름을 가득 넣은 후 내게 기름값을 지불할 것을 요구하는 거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과속한 것을 빼주었으니, 면허증은 내일 찾아가고, 면
허증 찾아가면서 약간의 수고료를 준비하라고 노골적으로 말하는 거였다. 사고 지역의 바퀴
자국(스키드 마크)으로 보아 시속 130 킬로는 넘게 달린 것을 시속 88킬로 정도로 낮추어
줄 테니 돈을 달라는 거다. 사고가 나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그
기회로 돈을 뜯으려는 경찰이 미웠지만, 나의 잘못이 컸으므로 그 다음날 그 당시로는 제법
큰 돈인 10 만원을 주고 면허증을 찾아왔다.
사고를 수습하고 집에 들어오니 밤 12 시 가까이 되어 있었다. 전화를 먼저 드렸었지만, 부
모님께서는 나의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안심을 하시는 것이었다. 부모님께 미안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나의 심적 고통을 이해하시는 지 부모님께서는 내 방에 가서 푹 쉬라고 말
씀해 주셨다.
아침에 일어나니 온몸의 근육이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본능적으로 핸들(스티어링)을 꽉 잡
은 데다가 자동차가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목 근육을 비롯한 온몸의 근육이 아팠다. 사고를
당한 순간에는 정신력으로 돌아다녔던 것 같다.
잠에서 깨어나자 당연히 무엇보다 미경이의 건강 상태가 궁금했다. 미경이네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 자넨가?
한 동안 아무 반응이 없다가 미경이의 어머님께서 말씀하셨다.
- 죄송합니다. 미경이는 괜찮은가요?
- 참, 내 딸도 철이 없네만, 자네는 천방지축이로구만. 도대체 자네 운전한 지가 얼마나 됐
다고 그렇게 험한 길에서 과속을 하나? 다행히 내 딸은 검사 받고 큰 이상은 없어 통원치료
를 해도 된다고 해서, 어제 늦게 들어왔네만, 일단 전화 끊겠네.
그녀의 어머니는 무척 화난 목소리에 일방적으로 용건을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사실 그
때까지 미경이의 아버지와 여동생 그리고 오빠는 나를 미경이의 결혼상대로 비교적 호감을
갖고 있었으나, 그녀의 어머니는 속된 말로 나를 ‘사위로 맞이하자니 좀 부족하고 그렇다고
결혼을 반대하자니, 뚜렷한 명분이 없고, 솔직히 말해서 남 주기는 아까운 생각이 드는 상
황에서 딸의 나이가 차고 있음을 생각했다고나 할까? 그런 심정을 내게 표정으로 나타냈었
다. 난, 남의 눈치를 보는데 비교적 예민한 편이다. 미경이의 오빠도 의사였고, 그녀의 형부
도 의사였으니 둘째 사위도 의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셨으리라.
그 사고 이후로 미경이의 어머니는 노골적으로 우리의 만남을 반대했다. 내가 주말에 그녀
의 집으로 전화를 걸면 무조건 없다고 대답하는 거였다. 할 수 없이 회사로 전화를 걸어서
그녀를 만날 수밖에 없었다. 그 끔찍한 교통사고를 겪고 처음 한 달간은 서로를 위로하며
데이트를 계속했었다.
견인해간 프라이드는 보험회사 직원의 요청에 따라 봉천동의 한 허름한 공장에 끌려갔었다.
1급 자동차 공장도 아닌 2급 정비소였다. 그렇게 많이 파손된 차량을 그런 곳에서 고칠 생
각을 하니 마음이 찜찜했으나, 나의 작업 지시도 없이 이미 부서진 프라이드를 고치기 위해
분해해 놓고 있었다. 내가 기아 자동차 직영 써어비스 공장으로 옮기겠다고 하자, 깡패처럼
인상이 험악한 사람이 그 때까지의 작업비용 20여만원을 내고 분해한 차를 가져 가라는 거
였다. 거친 말과 표정으로 협박하면서 말이다. 그 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것을 실감
할 수 있었다. 근처의 1급 정비소에 가서 사정을 이야기하자 자기네들이 작업비용을 대납해
주고 내 차를 고치기 위해 가져가겠다는 거였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할 수
없이 그 공장으로 만신창이가 된 차를 옮겼다. 그러나 그 곳도 기아 자동자 직영 써어비스
공장은 아니었고 개인이 운영하는 정비공장이었다. 경험을 통해 나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무리 수리 시간이 걸려도 견적이 꽤 나오게 부서진 차량은 반드시 해당 자동차회사 직영
써비스 공장에서 고쳐야 한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비 공장에서 고친 내 프라이드는
그 후 숱한 말썽을 일으켜서 가뜩이나 불편한 내 심기를 두고두고 괴롭혔다. 비 오는 날 와
이퍼를 켜면 잘못 조립된 와이퍼가 본넷트 위를 닦는 일도 있었고, 연료 필터를 중고 부속
으로 갈았는지 기름이 새서 하마터면 불이 날 뻔하기도 했다.
아까도 이야기한 거와 마찬가지로 사고 후 약 한 달 동안 우리는 계속 만났지만, 점점 내게
서 몸과 마음이 멀어져가는 그녀를 느꼈다. 어느 날부터 내 앞에서 더 이상 미소를 보이지
않았다. 그 날도 그렇게 어색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이별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했으나
아직 남은 나의 작은 자존심이 그걸 선언하지 못할 뿐이었다. 서로 마주 앉아 아무 말 없이
커피잔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녀가 내 구두의 코를 살짝 건드리면서 말했다.
- 오빠, 이제 우리 집에서 내 여동생 빼고는 아무도 오빠를 좋아하지 않아.
날카로운 비수처럼 그 말이 내 가슴에 꽂혔다. 순간적으로, 빠른 직감으로 내 머릿속에 ‘너
도야?’ 라는 단어가 떠올랐으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게
했다. 그녀의 나에 대한 애정이 식지 않았으면 그런 말을 꺼낼 이유가 없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그녀의 말은 정말 듣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나는 가장 담담한 듯
이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도 불란서 영화 이별의 장면이 떠올랐다. ‘그래, 옛날에
’’은경’’이를 보냈듯이 그녀를 이쯤에서 보내야 해’ 나는 머릿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그녀의 말에 난 간단하고 짧게 대답했다.
- 미경아, 먼저 일어나.
- 미안해, 오빠. 오빠가 먼저 일어났으면 좋겠어.
- 내가 네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하고 먼저 일어나서 나가 줘. 난 이 커피
를 마저 마시고 나갈게. 행복해야 한다는 말은 안 해도 되겠지?
그녀가 일어나서 나갔다. 악수를 내게 청하기에 그녀의 손끝을 가볍게 잡고 약간의 미소를
머금으려 했으나 입가의 가벼운 경련만 일었다.
그녀가 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은 보지 않았다. 찻잔 속의 약간 남은 커피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를 위해 차를 샀다가 그 차로 인해 그녀를 보냈다.
당연히 마음은 엉망으로 망가졌다. 세상의 끝이 이토록 고통스러울까? 나 자신이 정말 싫었
다. 담배를 두 대 연속으로 피고 그 카페를 나왔다. 다시는 서울역 근처의 이 카페 ‘에델바
이스’ 에 오지 않겠다고 양쪽 어금니를 꽉 물었다. 포장마차에 가서 소주 두 병을 마시자
빈 소주병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그렇게 그녀는 떠나갔다.
엉터리로 고쳐진 ‘프라이드’ 는 그 이후로도 계속 문제를 일으켰다. 이제는 정말 그 차를 쳐
다보기도 싫었다. 그 차를 볼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할부로 산 차에다가 대형 사고
를 당했던 차이므로 쉽게 처분할 수도 없었다. 장안평 시장에 이리저리 알아보니 할부금을
떠안는 조건으로 내게 10만원만 주고 차를 가져가겠다는 사람이 있어 꼼꼼히 생각할 겨를
도 없이 그가 써주는 계약서를 받고 자동차 열쇠를 내 주었다. 그 사람은 명의 이전을 하기
도 전에 차를 가져갔으나 그 차로 인해 심신이 괴로웠던 나는 빠른 시간 내에 명의 이전을
하겠다는 그의 구두 약속만으로 프라이드의 열쇠를 그에게 주었다.
막상 자동차 중개인이 그 차를 가져가자 한 편으로는 마음이 개운한 듯하면서도 많은 상실
감으로 마음이 허탈했다. 난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다. 아직도 그녀의 잔영이 내 가슴
에 남아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이렇게밖에 처신하지 못한 내 자신에 대한 미움으로 하루하루
가 지옥과도 같은 나날들이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배고픔을 느낄 수 없었으며 침이 분비
되지 않아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내 우울의 심연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으며, 수업
시간에 바람에 교과서 낱장 여러 장이 넘어갔는데도 넘어간 곳을 수업하기도 했다.
4월의 눈부신 신부가 된 여동생의 결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이후로
내 마음의 병은 점점 더 깊어갔다. 잠들 때마다 간절히 기원했다. 그냥 이대로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불행은 한 가지만 오지 않는다고 그랬던가?
88년 6월의 어느 날이었다. 내가 그렇게 명의 이전을 재촉할 때마다 이런저런 핑계로 회피
하던 자동차 중개인인이 아직까지 내 명의인 차로 사고를 냈다는 연락을 받았다. 횡단보도
에서 두 사람에게 상해를 일으킨 인명 사고였다. 그 사람은 뺑소니를 치고 차적 조회를 통
해서 경찰이 내게 연락을 한 거였다. 나는 계약서를 보여 주면서 내게 책임이 없음을 주장
했으나 피해자와 경찰의 생각은 달랐다. 더욱이 내가 받아놓은 계약서는 관인 계약서가 아
닌 사적인 계약서라는 거였다. 관인 계약서만이 법적인 효력을 발휘할 수 있으므로 그 프라
이드는 내 소유라는 거였다. 나는 그 사람이 낸 사고의 책임까지 지게 되었다. 횡단보도에
서의 교통사고 피해자 치료비로 1000만원 가까운 돈이 들어갔다. 정말 가혹한 삶의 시련
이 아닐 수 없었다.
2011. 9 . 26
...
Give me Strength / Eric Clap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