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숙소로 돌아와 몽롱한 정신과 육체에 남아있는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불침번이 주번 사령실로 오라고 한다.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가보니
주번 사령(내과 과장 소령)이 묻는다.
“너 혹시 NOQ갔다 왔나?” “예, 김혜X 중위 타자 가르쳐 주고 왔습니다”
“왜 오밤중에 타자를 배우나?” “저도 모르겠습니다”
“몇 번이나 갔어” “세 번 갔습니다”
내과과장은 충북대 의대를 나온 노총각이었는데
평상시 나한테 처방전을 많이 내던 안면이 많은 사람이었다.
몇 가지를 더 물어보며
실마리를 찾으려 하는 의도가 보였으나
나도 실마리를 주지 않기 위해 김 중위와 나를 위해 최선의 답변을 했다.
결국 김 중위한테는 자기가 이야기 할 테니
앞으로 간호장교 숙소에 출입하지 말란다.
다음날 오후 내과과장의 호출이 있어 찾아갔다.
내과과장과 김 중위가 어떤 말을 나눴는지 모르지만
좋은 일이 아닐 것이란 짐작은 갔다.
“당신 이 병원을 떠나야 될 것 같다”
통합병원의 규정상 6개월 체류시 의가사 제대를 하든지
아니면 원래 부대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단 병원의 필요시
의무병으로 차출 할 수 있는 예외 규정은 두고 있다.
내 원래 부대는 논산훈련소였기 때문에
나는 병원 의무병으로 계속 근무하기를 원했는데 떠나라니
뭔가 나에게 불리한 일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동안 의무병으로 수고했으니
광주통합병원으로 후송시켜 주겠단다.....일주일 후에.
광주로 가서 계속 환자로 있으면 편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떠나려니 마음이 편치 않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는 이랬다.
내과 과장이 김혜X 중위를 불렀다.
자초지정을 이야기하던 김 중위가 말하면서
자기 감정을 조절 못해 울어버린 것이다.
노총각이고, 유순한 의사고, 혹시 내과과장
본인이 좋아했을 수도 있고 기타 여러 추측가능한 이유 때문에
자기만 알고 수습하되 김원기는 병원에서 쫓아내겠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떠나기 전 X-레이실에서 단 둘이 만났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당신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앞으로 군대생활 잘 하라며 어깨를 툭툭 쳐주는데
며칠 전 느꼈던 그녀의 촉감이 되살아나 안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기가 쉽지 않았다.
“연락 드릴께요”
“정말 연락 오는지 두고 봐야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와락 안아 버렸다.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나도 거칠 것이 없었다.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간호사복 단추를 풀어 보았다.
스커트 밑으로 들어간 내손이 그녀가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마치 서로의 X-레이를 찍듯
가슴 깊숙이 깊숙이 서로를 새기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X-레이실이 가쁜 숨소리로
가득 채워진다
한여름 혼수상태로 앰브란스에 실려 들어와
눈오는 한겨울에 쫓겨났다.
6개월 만에 처음 보는 바깥세상.
광주통합병원으로 가는 창밖 경치는 눈이 많이 내려 연하장에
나오는 동양화의 그림과 똑 같다.
광주병원 의사가 아프지도 않은 놈이 왜 이렇게 병원에 오래 있었냐며
한 달 만에 퇴원시켜 버렸다.................헐
서울법대 약발이 다 떨어진 것이다.
다시 논산훈련소에 갔더니만 나를 발로 찾던 조교가
살아와서 고맙다고 극진히 대해주었다.
논산 훈련소는 3개월 지나면 다시 훈련받아야 되는 규정이 있어
처음서부터 다시 훈련 받았다. 한여름에 훈련 받고 한겨울에 다시 한번 받고
운명은 한번 꼬이면 잘 풀리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훈련 중 쉴 때마다 조치원 하늘을 쳐다보며 혼자서 빙그레 미소 지으며
감회에 잠기곤 한다......그 때가 스물 두 살 이었다.
그 날 밤, 그 추억의 밤은 새로운 감각이 되어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내 몸 한구석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다시 태어나면 진짜로 서울법대에 들어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며
이글을 마친다.
PS)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젊은 날의 내 일기를 기꺼이 읽어준 친구들에게 고맙고
컴밍 아웃의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린 저에게 여러분의 답글은 큰 힘이 되었다.
매일 전화하며 다음 편 빨리 안올리면 가만 안둔다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던 계은이 덕분에 빨리 쓰게 되었다.
우신출판사 강요찬 사장에게도 감사드린다.
2010년 칠월의 마지막날
김 원 기